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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걷기를 알아?”

자유행동 2007. 8. 27. 16:38
남자들에게 ‘걷기’는 그저 운동이 아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에게 걷기는 행군(行軍)을 떠올리게 하며, 그 말 속에는 추억이 묻어 있다. 밖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건빵 한 조각이 군대에서 행(行)하다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는 맛이 된다. 훈련소에서 20kg 군장을 매고 45km를 걷다 보면 차라리 숨 막히는 화생방 훈련으로 깔끔하게 한 번에 마무리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 이런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 걷기는 그냥 걷기일 수 없다.
군에 다녀온 남자들은 저마다 군 생활이 힘들었노라 하소연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부대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다. 오죽하면 일용직 고용 때 모 예비사단 출신이라면 일당을 더 준다는 말이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40만 육군 병력 중 최강의 걷기 마니아는 누굴까? 우선 해병대나 특전사 같은 특수부대는 비교 대상에서 제외다. 귀신 잡으려면 보통 훈련으로는 어려우니 당연히 많이 걷고 또 힘들다.

거침없이 걷는다, 우리는 예비사단
육군은 크게 3군으로 나뉜다. 최전방을 담당하는 1군과 3군 그리고 후방을 맡고 있는 2군. 이중 강원도 전역을 관할하고 있는 1군이 가장 많이 걷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정확한 보병의 훈련 내용은 대외비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최근 전역 3년차 예비역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을 때 예비사단 부대들이 가장 많이 걷는다는 게 지론이다.
세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70~80년대 군번들 사이에서는, 최전방부대를 뒤에서 받쳐 주는 예비사단에 복무한 병사들이 전역하기 전까지 지구 반 바퀴를 돌았느니, 우주에서 인공위성으로 지구를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과 한국의 예비사단 장병들이 걸어 다닌 행군로가 같게 보인다느니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럼 과연 예비사단 병사들은 얼마나 걸을까? 우선 훈련이 많기로 소문난 주요 예비사단들을 보면 11사단(호국부대, 일명 젓가락 부대), 8사단(오뚜기부대), 27사단(이기자부대), 3사단(백골부대), 2사단(노도부대)이 있다.
이들 부대는 기본적으로 한 달에 한번은 훈련이 있는데, 해마다 치러지는 훈련이 있는가 하면 해를 달리해 실시되는 훈련들이 있다. 작은 훈련은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있다고 한다. 여기에 큰 훈련이 낀 달에는 한 달에 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 훈련을 나갈 때도 있다고 한다.
작은 훈련 때 행군거리는 보통 왕복 80km정도. 1년에 작은 훈련만으로도 960km정도를 걷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더해지는 훈련들을 감안하면 평균적으로 1년에 최소한 1000km 이상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전역할 때까지는 약 2000km가 넘는 거리를 걷는 셈이다. 거리로 따지면 걸어서 서울부터 중국의 마카오나 미국의 알래스카까지 갈 수 있는 거리다.
“걷다보면 왜 걷는지도 몰라요. 말 그대로 워크홀릭이죠. 예비사단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군복무기간 동안 최소한 국토대장정을 5번 정도는 하는 거죠. 2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산길을 걸으면서 말이죠. 70~80년대 복무한 선배들 얘기를 들으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13박14일 동안 행군만 한 적도 있다더라고요.” 2년 전 한 예비사단에 복무한 S씨의 말이다. 보통 보병들의 행군속도가 시속 4km/h인 것을 감안하면 약 500km가 넘는 거리를 한 번의 훈련에 소화한 셈이다.

걷는 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교육부대
1년에 1000km가 넘는 거리를 걷는 부대가 있는가 하면, 1년에 100km 내외의 거리를 걷는 부대도 있다. 일단 부대 역할이 전투력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곳이 그렇다. 육군 내에서도 교육을 담당하는 육군훈련소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육군훈련소가 적게 걷는 것은 아니다. 훈련소에서 생활하는 조교들은 매 기수들이 들어올 때마다 실시하는 야간행군을 비롯해서 각종행군을 통해 한 기수 당 최소 100km 넘는 거리를 걷는다. 전역할 때까지 보통 18기수를 담당하니 예비사단 못지않게 걷는다고 할 수 있다.
보병을 교육하는 육군훈련소 이외에 특기병과 군 간부를 교육하는 교육 부대들은 부대 설립목적이 교육이라 훈련 보다는 교육지원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몇 년 전 한 교육부대를 전역한 K씨는 “각종 교육지원에 근무까지 나가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몰라요. 거기에 훈련까지 있는 날이면 짧은 거리인데도 걷는 게 여간 힘들게 아니에요”라며 군 생활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