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은 창부였나, 엔터테이너였나
뮤지컬 ‘황진이’는 영화 ‘청연’의 음악으로 올해 대종상 음악상을 수상한 미하엘 슈타우다허가 음악감독을 맡아 화제가 됐다. 주연에는 문혜원과 서정현이 더블 캐스팅됐다. 시야를 조금 넓혀 ‘기생 콘텐츠’로 주제어를 넓혀 보면 내년 초를 겨냥하고 있는 ‘해어화’ 프로젝트가 눈에 들어온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제목을 따온 ‘해어화’는 내년 상반기 중에 드라마가 먼저 방송된 뒤 뮤지컬로 무대에 올려진다. MBC 드라마 ‘해어화’의 주인공은 김희선과 박지윤으로 결정돼 ‘황진이’ 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뮤지컬 ‘해어화’의 제작자는 영화배우 허준호다. 줄거리로 보면 ‘황진이’의 프리퀄(prequelㆍ원래의 이야기에 앞서는 내용을 가진 속편)에 해당하는 김동화의 만화 ‘기생 이야기’도 내년에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기생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유로 송도를 찾아와 기생이 되는 두 소녀의 인생 이야기. 둘 중 현금이라는 소녀가 황 진사와의 사랑을 통해 딸 황진이를 낳는다. 그렇다면 황진이와 조선시대 기생들의 어떤 매력이 이토록 많은 브레인, 투자자, 그리고 스타를 끌어들인 것일까. 다른 이유가 무엇이든 ‘황진이 붐’ 또는 ‘기생 이야기 붐’을 일으킨 두 편의 영상 작품을 꼽자면 역시 MBC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 드라마 초반 ‘황진이’와 여러 모로 비교됐던 ‘대장금’은 철저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했던 여성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필연적인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기생과 궁녀는 다양한 이유로 결혼과 연애에 제한을 받아야 했다는 점도 겹친다. 또 하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시아를 겨냥하고 내놓은 대형 프로젝트 ‘게이샤의 추억’이다. 이 영화의 플롯은 ‘대장금’이나 ‘기생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게이샤가 각각 후계자 격인 두 어린 게이샤를 키우고, 이 두 소녀는 성장해가면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운명적인 경쟁에 들어간다. ‘일본에서 게이샤를 통해 볼거리를 만들어낼 때 과연 한국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기생’이라는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몰라도 ‘게이샤의 추억’이 세계적으로 만만치 않은 화제와 흥행 성적을 거뒀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리엔탈리즘의 극치’ ‘남성우월주의’라고 비판을 받을지언정, 한 동양 국가에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남자에게 몸을 파는 것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갖는 고급 창녀군이 존재했고, 그들을 소재로 한 영상물을 만들 수 있다면 수출용 상품으로도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업계를 휩쓴 것이다. 무엇보다 ‘황진이’는 장희빈, 명성황후, 정난정 등 그동안 사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했던 한국형 팜므 파탈(위험한 여인)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게다가 지난 20년간 TV 드라마와 영화로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TV 드라마로는 1982년 MBC ‘여인열전’의 ‘황진이’ 편에서 이미숙이 연기한 것이 마지막이다. 영화에서도 1986년 장미희가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에 출연한 뒤로는 맥이 끊겼다. 말하자면 매우 신선한 소재인 셈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일본 등에서 대장금에 출연한 이영애의 얼굴을 상표로 사용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제의가 쏟아졌다. 이영애의 측근은 “아마도 ‘대장금’으로 돈을 벌려고 제대로 마음을 먹었으면 ‘대장금’의 제작비 이상을 벌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대장금’을 통해 실제로 돈을 번 사람은 드물다. 드라마 ‘대장금’이 우수한 콘텐츠이긴 했지만 애당초 돈을 벌겠다는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으므로, 관련 상품들이 개발되고 난 다음에는 이미 ‘대장금’의 열기는 한풀 꺾여 가고 있었다. MBC는 뒤늦게 전담부서까지 설치해 가며 ‘대장금’을 통한 매출 확대를 추진했지만 지나치게 늦은 시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성공과 브랜드 ‘대장금’의 실패는 많은 제작자에게 자극을 줬고, ‘황진이’의 제작사 올리브나인은 처음부터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했다. 이미 MBC ‘주몽’을 통해 전남 나주 세트를 관광지로 만들었고, 주몽 캐릭터, 주몽 복분자주에 이르는 수많은 상품을 개발한 올리브나인은 최근 ‘황진이’의 첫 상품으로 화장품과 쌀을 내놓았다. 은종태 올리브나인 기획운영팀 대리는 “제작 초기 단계부터 ‘황진이’를 통해 개발할 수 있는 상품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기생이 용모를 꾸미는 데 적극적이었던 만큼 화장품은 가장 유력하게 추진됐던 전략 상품”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황진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직업이 직업이었던 만큼 정사(正史)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다. 연인이었던 소세양이나 서경덕의 생몰연대로 볼 때 그저 중종 초 사람이라고 추정하는 정도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불렸던 황진이를 그려보면 일단 요부의 이미지가 앞선다. 30년 면벽수도를 했다는 고승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나 서경덕에게 육탄으로 대시했다는 전설 등이 모두 그렇다.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벽계수의 말고삐를 쥐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중략)명월이 만공산한데 쉬어가면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어 그를 무릎꿇게 했다는 무용담 또한 만만찮은 염기(艶氣)를 후세에 전한다. 황진이의 두 번째 얼굴은 시대를 초월한 자유연애주의자의 모습이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데에는 그를 사모하던 도령이 상사병으로 자살한 것이 이유였다고 전해진다. 도령의 관이 황진이 집 앞에서 꿈쩍도 않자 황진이가 자신의 속치마로 관을 덮어 넋을 위로해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이후 황진이가 ‘한 사내에게만 정을 주어 수많은 다른 사내를 애타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기생이 됐다고 한다. 이 전설을 실증이라도 하듯, 황진이는 수많은 풍류남아들과 염문을 뿌렸다. 당대의 기생이라면 남자를 재물 축적이나 노후 대비 수단으로 삼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황진이는 사대부(士大夫)를 만나면 사대부처럼, 예인(藝人)을 만나면 예인처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섰다. 사대부 이사종과 6년 간 동거를 하되 처음 3년은 황진이가, 나중 3년은 이사종이 모든 생활비를 대기로 했다는 계약은 너무도 현대적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다. ‘어우야담’은 황진이가 양반 자제인 이생과 함께 금강산으로 무전여행을 떠나 옷이 누더기가 되어 이가 기어나올 때까지 산천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마지막 얼굴은 예인으로서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여류 문학가를 꼽을 때 황진이를 빼고 얘기하는 법은 없다. 시(詩)ㆍ서(書)ㆍ화(畵)ㆍ가(歌)ㆍ무(舞)에 능하다는 평을 듣는 황진이지만 그림과 글씨는 전해지는 바가 없고, 가무 또한 본 사람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용모가 뛰어났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글 시조와 한시의 수준이 상당한 것을 볼 때 당대의 예인으로 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특히 문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지나면서 ‘청초 우거진 골에/자난다 누웠난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지었다가 ‘사대부의 체통을 어겼다’며 파직당했다는 일화는 황진이의 명성이 가졌던 위력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겠다. 요즘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황진이 혹은 기생 콘텐츠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앞서 말한 ‘세 번째 얼굴’의 집중 조명이다. 황진이 콘텐츠 제작자들은 대부분 황진이를 포함한 당대의 기생을 창기(娼妓)라기보다 현대의 ‘엔터테이너’와 같은 선상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드라마 ‘황진이’다.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에서 황진이 역을 맡은 배우 하지원이 “황진이가 오늘날 태어났으면 아무래도 연예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봐도 그렇지만 동기(童妓)들이 받은 춤, 음악, 교양에 대한 고된 훈련은 최근의 대형 엔터테인먼트사 소속 연습생들이 흘리는 비지땀을 연상시킨다. 의상만 바꾼다면 최근 연예계 지망생을 소재로 했던 MBC TV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 ‘황진이’ 속의 기생들은 공연에 열중할 뿐, 술을 따르거나 수청을 드는 모습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지난 10월 26일 6회 방영분에서야 ‘화초를 올린다(첫경험을 해서 기생이 된다)’는 말로 성적인 의미가 처음 등장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강사 정지영씨는 “기생이 엔터테이너로서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일면 타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성적인 서비스까지 미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뮤지컬 ‘해어화’의 제작자 허준호 역시 “기생을 엔터테이너로 여기는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해어화’는 사랑할 권리조차 빼앗긴 제도의 희생자라는 시각에서 기생들을 다룰 것”이라고 차별화를 선언했다. 드라마 ‘황진이’의 연출자 김철규 PD는 “황진이의 이미지는 성적인 이미지도, 엔터테이너로서의 이미지도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보는 황진이는 뛰어난 재능과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사회의 벽에 부딪힌 비극적 인물이며, 신분의 벽에 맞서 싸우는 개척적인 여성”이라고 말했다. 과연 드라마 후반부의 황진이는, 그리고 내년까지 이어질 수많은 브라운관ㆍ스크린ㆍ무대 위의 황진이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궁금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