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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들 올 추석엔 오려나…

자유행동 2006. 9. 29. 22:18
내 새끼들 올 추석엔 오려나…



장항선의 조그만 시골 역인 청소(靑所)역 앞에서 만난 최봉희(75·충남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 할아버지. 청소면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농사는 5년 전부터 그만뒀다. 힘도 부쳤지만, 갑자기 쓰러진 아들 병구완을 위해 전답을 모두 처분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요즘은 15평짜리 임대주택에서 힘들게 살지만, 명절 때 들르는 자식들에게 안겨 보낼 찹쌀 몇 가마는 진작 인근 농가에 주문해 놓았다.

“촌에 불쌍한 노인네들이 많아. 자식들이 찾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하고…. 에이, 요즘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그래도 부모들이 잘못한다고 자식 욕 하나.”

할아버지는 몇 년째 소식이 없는 조카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말이 빨라진다.

“수년 전 갑자기 돌아가신 형님을 내가 고향에 묻었지. 근데 (형님 아들은) 좀처럼 고향에 안 와. 연락도 없고. 제사도 내가 지내고 벌초도 사람을 사서 내가 해.”

한참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잇는다.

“공사판을 전전한다고 하는데 아픈 데는 없는가 몰라. 술도 많이 먹는다는데. 그놈이 잘돼야 하는데. 이번 추석에는 내려오려나….”

할아버지가 슬며시 말끝을 흐릴 때쯤, 역사에서 조금 떨어진 철길 옆에는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가 때마침 지나치는 열차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그 누구를 기다리는 중일까.

청소역에 다음 기차가 닿으려면 해가 넘어가야 할 텐데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다. 한마디 말도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많은 사연을 풀어 놓는 기찻길의 할머니다.

시골 간이역. 타향살이에 나선 그곳 출신들은 물론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얼룩진 대도시에서 태어난 이들에게조차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귀소본능을 자극하는 고향의 정물이다. 성공을 다짐하며 서울행 기차에 오른 아들딸들을 배웅하러 나선 우리네 어버이들은 열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간이역 앞 철길 곁에, 꼭 저렇게 서 있었다.

가 추석을 앞두고 시골 간이역을 둘러봤다. 역 주변은 곧바로 전형적인 농촌 지대. 너무도 익숙하고 평이한 풍광이 오히려 머릿속을 온갖 상념으로 가득차게 만드는 곳이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쫓겨 기억 저편으로 밀쳐 놓았던 고향이, 시골 간이역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추석이다. 이번 추석 귀성길은 모두 편안하기를, 시골 간이역이 다시 그리운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 주기를, 철길 주변을 서성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 보름달같이 환한 웃음이 피어나기를….

최 할아버지도 이번 추석엔 보고 싶은 조카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청소역(보령)=글·사진 박창억, 그래픽 최진영 기자 danie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