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경산조폐창 인쇄2과 이치우(오른쪽)·민상규씨가 전지 형태로 인쇄돼 나오는 5000원권 가운데 잘못 인쇄된 것이 있는지 돋보기로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경산=조문규 기자 | |  | | | 경북 경산시의 한국조폐공사 경산조폐창 800여 명의 직원은 비상근무 중이다. 내년 1월 시중에 선보일 새 1만원권 지폐를 찍는 일 때문이다. 지난해 8월부터 일요일을 반납했고, 이번 추석 연휴에 고향 가는 것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1000원권, 5000원권, 1만원권 등 지폐 세 종류가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2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크기가 작아진 새 5000원권은 지난 1월 유통이 시작됐고, 새 1000원권도 최근 인쇄를 마쳐 한숨 돌렸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새 1만원권의 납품 날짜를 맞추기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다. 특히 지폐를 만드는 인쇄처 직원 200여 명은 2교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근무한다. 휴일까지 일하지 않고서는 내년 1월에 필요한 물량을 댈 수 없어서다.
지난달 30일 기자는 국내 유일의 '돈 공장' 경산조폐창을 찾았다. 인쇄처 직원을 따라 지문인식을 거친 뒤에야 돈을 만드는 작업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1만원짜리 45장이 전지 한 장에 선명하게 찍혀 나왔다. 바탕 그림이 인쇄된 뒤 4일쯤 말려 다음 공정에서 약간 볼록하게 숫자를 찍는 등 지폐 한 장이 인쇄되는 데는 한 달쯤 걸린다고 한다. 1만원권 전지는 인쇄상태와 홀로그램 등 위.변조 장치 등 점검이 끝나면 낱장으로 잘라져 작업장 건너편의 보관동으로 옮겨진다. 보관동은 지문보다 한 단계 높은 보안장치인 홍채(虹彩) 인식장치가 허가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뭐가 힘드냐고요? 새 1만원권이 유통됐을 때 단 한 장이라도 불량품이 나올까 봐 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쇄2부 김교찬(46) 공정과장은 "위폐와 전쟁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업무량이 늘어난 것은 별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 5000원권에서 홀로그램이 빠지는 사고로 조폐창이 올 들어 홍역을 치른 뒤여서 완벽한 '제품'에 더욱 신경 쓰게 됐다는 설명이다. 직원들은 새 1만원권 인쇄하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지폐 인쇄 일을 오래 하더라도 새 은행권의 시작 인쇄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폐창에서 돈은 '물건'이나 '제품'으로 불린다. 제품을 주문한 한국은행이 물건을 인수한 뒤에라야 비로소 '돈'이 된다는 것이다.
이번 1만원권은 위.변조 방지 기능이 두 배로 강화됐다고 한다. 제작과정이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졌는데도 6개월 만에 제품이 생산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사실 경산조폐창의 화폐 제조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화폐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20개국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이스라엘 등에 화폐를 수출하기까지 한다.
인쇄처 옆에 휴게실이 마련돼 있다. 이곳 커피 자판기에는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만 통용되는 별도의 코인을 넣어야 한다. 벽면엔 인쇄처장의 격려문이 붙어 있다. 8월 한 달간 새 1만원권을 185기호나 생산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내용이다. 1기호는 100만 장을 나타내는 단위. 그 이전의 최고 기록은 150기호였다.
돈 공장인 만큼 방문객은 물론 내부 직원들에게도 보안 규정이 엄격히 적용된다. 직원들은 출근하면 환복장에서 청원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청색 근무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여직원은 사무실로 들어갈 때 화장품 등 소지품을 분홍색 투명 손가방에 넣어 가져가야 한다. 감시카메라는 조폐창의 230여 곳에 설치돼 있다. 입사 19년째인 최순이(38)씨는 "방문객은 까다로운 보안절차가 불편할지 모르지만 직원들은 익숙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조폐창 직원에겐 몇 가지 금기가 있다. 빚을 지는 것은 금물이며 조폐창 안에선 현금을 소지하지 못한다. 행여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물건'을 슬쩍하는 사심이 생길까 염려해서다. 내기 족구도 금지할 만큼 심심풀이 내기도 허용되지 않는다.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스스로 점검하는 부패지수를 측정한다. 입사해서 퇴직할 때까지 가장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이런 준법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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